애니쿤(Anikoon)은 로봇이라는 페르소나와 함께 웃는 어린시절의 기억 속 내 모습이다, , 누구나 어린시절 추억은 가지고 있기에 세대를 아우르며 주목을 받고 있는 현대 미술 작가이다.
‘페르소나(persona)’는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서 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데, 나를 가리고 숨기 위해 쓰이는 페르소나는 우리 내면의 깊은 본 모습이라 기 보다는 우리가 쓰고 있는 가면인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본 모습은 우리 자신도 모르는 저 깊은 본질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쓰고 있는 그 가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애니쿤(Anikoon)의 페르소나는 바로 로봇이다. 그에게 있어서 로봇은 단순한 소재가 아닌, 현대 사회의 인간성을 재조명하는 중요한 매개체이다. 작가는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애니메이션(Animation)과 소년을 일컫는 군(君)을 합친 합성어인 애니쿤(Anikoon) 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는 작가는 ‘만화소년 ’과 같은 천진함을 자신의 로봇들에게 부여하고 대중과 소통하는 예술활동을 펼치는 작가이다. 그는 스스로를 ‘아날로그와 디지털 사이에 끼인 세대’라 표현하며 태엽을 감는 로봇의 형상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마치 감정이 없는 객체처럼 살아가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 따스한 마음을 품고 있다고 전한다.
피카소의 작품들을 팝아트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작품활동을 하던 작가는 안티크 상점 마당에서 만난 로봇에게 자신을 투영하면서 애니쿤(Anikoon)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한 때 누군가에게는 무척이나 소중했던 장난감이자 친구였던 로봇이 이제는 더 이상 필요 없어지고 나서야 벼룩시장에 등장했을 것이다. 멀쩡해 보이지만 다소 낡고 서글퍼 보이는 이 로봇들에게서 애니쿤(Anikoon)에게는 상처이자 아련한 추억, 어린시절 자신의 가물어 가는 기억 한 켠의 모습들과 마주한다. 그러면서도 그 이면에서의 씩씩하고 발랄하게 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현재 자신의 모습 또한 함께 투영하고 있다.
사실, 애니쿤(Anikoon)의 로봇은 첨단 과학기술의 집합체나 반짝이고 세련된 모습을 한 로봇이 아닌, 대중문화의 아이콘처럼 친근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애잔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빈티지 로봇이다.
피카소를 비롯해 제프쿤스, 앤디 워홀의 작품에서 차용한 익숙한 이미지들과 커피잔과 소서, 코카콜라, 각종 인형과 장난감 등 친근한 소재들로 작업해 온 애니쿤(Anikoon)에게 로봇은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잘 전달해 줄 수 있는 가장 친한 친구, 절친이 되었다. .
안티크 상점의 주인 잃은 낡은 로봇들을 고치기도 하고 보듬어 주기도 하며 애니쿤(Anikoon)은 로봇에게 자신의 화면에서 새 삶을 열어주고자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며 소통하고자 한다. 이 로봇들은 “Hello!” 인사하며 다가와 “Would you be my friend?”라 하며 친구가 되고 싶어하고, 때로는 “The damned world”를 외치며 짜증도 내고, 악당들을 물리치기 보다는 눈빛 광선을 마구 쏘아대다 캠벨 스프 깡통이나 코카콜라 깡통에 갇혀 버리기도 하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운 것은 이 로봇들이 위협적이기 보다는 로봇을 가지고 노는 아이들의 땡 깡처럼 내 안의 어린시절 동심을 이끌어 내어 줄서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애니쿤 로봇들의 표정은 마냥 행복하고 마냥 해맑게 웃고 있지만은 않다
는 것이다. 그 웃음은 장난스럽고, 때로는 멍하며, 때로는 당황스럽고, 때로는 슬퍼 보인
다.
애니쿤(Anikoon)의 로봇이 전하는 소통의 의미는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던 어린시절을 느껴보자는 것이 아닐 것이다. 부러지고, 화나고, 때로는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명랑 로봇들을 바라보며 내 안의 어린시절 그때를 되돌아 들여다보며 그와 함께 솔직해지자는 공감의 소통일 것이다. 그래서 애니쿤(Anikoon)의 로봇은 회화에서 뿐 아니라 조형에서 우리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의 크기가 되기도 하고, 우리만큼 커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 큰 덩치로 우리를 위로해 줄 것처럼 점점 커지기도 한다.
애니쿤(Anikoon)이 로봇의 껍데기를 입고 있어도 또, ‘소년’이라고 이름으로 정했어도 마냥 단단한 겉껍질을 두른 명랑한 소년일 수 없듯이 우리는 모두 상처받고 그 상처에도 웃는 복잡다단한 인간이다.
그러나 로봇이라는 가면도 소년이라는 가면도 모두 애니쿤(Anikoon)이다. 그리고 애니쿤(Anikoon)은 그 가면을 우리에게 나누어 주고 있다. 우리가 잊고 살았던 그 ‘소년’, ‘소녀’,
상처받았지만 명랑하게 웃는 로봇들처럼 아쉬움과 고통 속에도 어린시절을 웃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어른이’ 되길 바라는 마음과 로봇의 가면 속 작은 ‘어린이’ 가 아직 남아있음을 유쾌하게 즐길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다.